호주령 크리스마스섬에서는 남반구에 봄이 오고 우기가 시작되는 10월부터 12월 사이, 새빨간 게 무리가 도로를 가득 메우는 장관이 펼쳐진다. 산란기가 찾아오면 열대우림 속 정글에서 바다까지 옆으로 옆으로 이동하는 호주 크리스마스섬 붉은게 대이동이 시작된다.
올해도 어김없는 호주 크리스마스섬 붉은게 대이동
주민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뒤덮은 게들을 다치게 할 수 없어 길을 비워준다. 크리스마스섬은 호주령의 비자치 지역으로 위치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작은 섬이다. 섬 면적의 63%가 국립공원이며 대부분이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인구는 약 1,200명인데, 섬에는 그 몇만 배에 달하는 수의 게가 산다.
이 섬에 사는 크리스마스붉은꽃게(Gecarcoidea natalis)는 평소 정글에서 지내다가 번식기가 되면 일제히 숲을 떠나 바다로 향한다. 해안가에 도착하면 수컷과 암컷이 그곳에서 굴을 파 교미하고, 수컷은 숲으로 돌아가며 암컷은 알을 낳기 위해 바다로 들어간다. 그 수가 수천만 마리, 많게는 1억 마리로도 추정되어 이 시기엔 말 그대로 발붙일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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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에서 해변까지는 게 걸음으로 약 2주의 여정이다. 그 사이 생명을 잇기 위해 도로를 목숨 걸고 가로질러 파도 치는 물가로 나아간다.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주의해 운전해도 바닥을 덮은 게들을 완전히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희생이 뒤따른다.
누구도 그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각종 대책을 세워 무사히 산란을 마치고 숲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도로 옆에 펜스를 설치하고, 자동차 타이어에 커버를 씌우고, 지하통로나 보행교를 만드는 큰 공사도 진행한다.

피크땐 게 이동이 최우선이라 동선에 해당하는 도로는 통제된다. 번거롭다고 느끼는 이도 있겠지만, “이 풍경을 직접 경험하는 건 일종의 특권”이라고 많은 주민이 여긴다. 크리스마스섬 국립공원 관리책임자 대행 알렉시아 얀코우스키는 주민들의 마음을 이렇게 전한다. “게들은 말 그대로 마이페이스예요. 바다에 닿기만 하면 되니 뭐든지 밟고 지나갑니다. 현관문을 열어둔 채 외출하면 거실 가득 붉은 게가 들어와 있기도 해요. 아침에 차를 빼려면 게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직접 헤치며 길을 내야 할 때도 있죠.”
이 시기엔 한 마리씩 손으로 옮겨선 끝이 없다. 그래서 등장하는 도구가 갈퀴다. 주민들은 갈퀴로 게를 다치지 않게 살살 밀어내며 조용히 길을 텄다.
해안에 닿으면 수컷이 굴을 파고, 암컷은 2주에 걸쳐 산란·포란을 한다. 암컷은 11월 14일 또는 15일 하현의 만조 때 알을 바다에 방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부화한 치게들은 해류를 타고 한 달가량을 보낸 뒤, 아마 올해도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조그만 게의 모습으로 다시 섬으로 돌아온다. 바다에서 되돌아와 붉은 융단처럼 땅을 덮는 꼬마 게떼. 이쯤 되면 갈퀴로는 감당이 안 된다.
“아기 게는 손톱 끝의 절반만큼 작아요. 갈퀴로 긁어 모을 수 없고, 자칫 으깨버릴 수도 있죠. 그래서 우리는 낙엽용 리프 블로워를 씁니다. 산란 후 약 한 달, 우리는 해변으로 나가 등을 멘 블로워로 작은 게들을 불어 보냅니다. 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지만, 차량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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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전 대책 덕분에 개체수는 배로 늘었다. 2000년대 초반엔 지금의 절반 수준이었지만 20년 사이 두 배가 됐다. 정부가 침입 외래종인 ‘옐로 크레이지 앤트(긴다리개미)’를 상대로 독 먹이 살포와 기생벌을 이용한 생물학적 방제를 도입한 영향으로 보인다. 어린 게를 포식하던 긴다리개미 군집이 줄어든 덕에 유생이 무사히 숲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아졌다.
크리스마스섬 주민들은 매년 되풀이되는 호주 크리스마스섬 붉은게 대이동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이 섬에선 게를 먹지 않는다. 식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공존을 선택했다. 매해 반복되는 대이동이 오면 주민들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갈퀴와 전동 블로워를 들고 조심스레 길을 내준다. 섬의 이름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미 게의 대행진도, 꼬마 게들의 귀환도, 이곳에선 홀리데이 시즌을 앞두고 도착하는 선물 같은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