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이야기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소개된 체험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공유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부모님에게 불려간 거실에는, 선풍기 바람만 덩그러니 헛돌고 있었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다. 자신이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수술도 이제는 생명을 조금 연장해주는 수준일 뿐이고, 여명이 1~2년 정도라고 했다.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충격 때문인지, 등에 땀이 미적지근하게 배어들었다.
우리 집은 자영업을 하고 있었고,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힘들어질 수 있는 상황.
성적은 늘 학년 최하위권.
‘낙오자’라는 자각만큼은 유난히 생생했다.
그 여름, 아버지는 항암 치료를 시작했고, 입퇴원을 반복했다.
통통하던 몸이 눈에 띄게 야위어 갔다.
그래도 현장에 계속 나가셨고, 힘들다는 말 한마디도 한 적 없었다.
“고등학교도, 대학도… 돈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넌 공부해라.”
그 말만큼은 유난히 크게, 선명하게 울렸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척만 했다.
교과서의 글씨들이 까만 얼룩처럼 번져 보였고,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펜을 쥐고 있었던 건, 아버지를 안심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2 겨울.
기말고사 성적은 결국 학년 꼴찌에서 두 번째.
담임 선생님은 나를 진로실로 불러 “지금 상태로는 추천도, 취업도 어렵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의 볼은 더 야위었고, 주름도 깊어져 있었다.
“넌… 장래에 하고 싶은 일이 없냐?”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는 꾹 눌러 참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없다면… 의사가 되어라. 공부해서, 내 병을 고쳐줘.”
가슴 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터졌고, 눈물도 분노도 아닌 열기가 북받쳐 올랐다.
그 자리에서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했지만, 마음은 그 순간 정해졌다.
그다음 날부터, 학교와 병실을 오가는 시간 외엔 전부 공부에 쏟았다.
단어장을 쥔 채 병원으로 달려가, 아버지 침대 옆에서 공식을 외웠다.
“오늘은 뭘 외웠냐?”
아버지는 하얀 마스크 너머로 매일처럼 작은 테스트를 내주셨다.
고3 여름.
매미 소리가 멀어지던 무렵, 아버지는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유품 속 수첩에는 달마다의 상환 계획과 내 학비 계산이, 깔끔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2년 동안 빚을 정리하시고,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수업료를 마련해 두신 것이다.
졸업 후 나는 재수를 거쳐, 지방 국립대 의대에 합격했다.
합격 통지서를 불단에 올려놓은 밤, 어머니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아버지는… 네가 꼭 고쳐줄 거라고, 늘 그렇게 말했어.”
지금 나는 암 전문 내과의로 일하고 있다.
아직 치료 성과는 일류라 할 수 없고,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을 만큼 실력도 모자란다.
그래도 야근을 마치고 복도에 설 때면, 병실 한구석에서 노트를 펴던 열여덟의 내가 떠오른다.
의사가 되어라.
아버지 병을 고쳐줘.
그 목소리가, 지금도 내 등을 밀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