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학창시절은 왜 엉망이었을까? 수학은 6점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지만 그의 학창 시절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우등생’과는 거리가 있었다. 틀에 박힌 교육 방식을 싫어했고, 권위적인 태도에 반발하며 선생님들과 자주 충돌했다. 결국 학교를 뛰쳐나온 일도 있었다.

그의 성적표와 학창 시절을 되짚어 보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의 색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일찍 철든 아인슈타인, 어린 시절부터 선생님과 마찰

 

3살 때의 아인슈타인
3살 때의 아인슈타인

 

1879년 3월 14일, 독일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조숙한 아이였다. 12살 때는 스스로의 사고력으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증명해냈고, 13살이 되기 전에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책을 탐독했다. 15세 이전에는 미적분학을 독학으로 익힐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학교라는 공간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주입식 암기 교육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권위적인 교사들에게는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자신의 지적 우위를 굳이 숨기지 않는 태도에, 선생님들은 종종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가 다닌 학교는 독일 뮌헨에 위치한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이라는 고등학교 과정의 학술 중심 교육기관이었고, 현재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김나지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물리학자 아브라함 파이스가 쓴 전기 “Subtle is the Lord”에는 이 학교에서의 에피소드가 소개돼 있다.

어느 날, 한 교사가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 교실에 없었으면 나는 훨씬 행복했을 거야.”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교사는 이렇게 받아쳤다.

“그 말도 맞지. 하지만 넌 뒤쪽 자리에 앉아서 히죽거리기만 하잖아. 그건 선생이 반에서 받아야 할 존중을 무시하는 태도야.”

그 교사는 나중에 “이 아이는 앞으로도 인생에서 아무 성과도 못 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군대식 교육과 권위에 숨 막혀

 

14세 때의 아인슈타인
14세 때의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에게 이 학교의 분위기 자체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의 여동생 마리아, 애칭 ‘마야’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군대식 분위기와 권위 숭배를 주입하는 조직적인 교육 방식은 학생들을 어릴 때부터 군대의 규율에 익숙해지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어요. 알베르트는 그게 특히나 불쾌했죠. 조만간 군복을 입고 병역 의무를 다해야 할 날이 올 거라는 생각에 공포를 느끼곤 했어요.”

 

자퇴 후 가족이 있는 이탈리아로

1895년, 아인슈타인이 16세가 되던 해, 부모님은 사업상의 이유로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그는 졸업을 위해 뮌헨에 남도록 권유받았지만, 17살이 되기 전에 가족과 합류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당시 아인슈타인 집안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버지 헤르만은 전기설비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고, 아인슈타인이 어릴 적만 해도 문화적·경제적으로 꽤나 여유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1890년대에 접어들며 사업이 침체되고, 경쟁도 심화되면서 경영은 악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탈리아로의 이주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편 당시 독일 국적법에 따르면, 만 16세 이상의 남성이 해외로 나가 병역을 기피하면 ‘탈영병’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마야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이 제도를 이해한 뒤 의사의 진단서를 받아 ‘정신적 피로’를 이유로 정식 자퇴했고, 졸업장 없이 이탈리아로 떠났다.

 

인맥을 동원해 스위스 연방 공대 시험 도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한 아인슈타인을 위해 가족은 인맥을 활용해, 스위스 취리히의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교(ETH) 입학 시험을 특별히 치를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는 물리와 수학 부문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뒀지만, 문학과 외국어 등 다른 과목은 성적이 좋지 않았다.

결국 시험에는 떨어졌지만, 당시 교장이던 알빈 헤르초크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1년간 아르가우 주 아라우에 있는 주립 예비학교에 다니라고 권유했다. 그곳을 졸업하면 정식으로 ETH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예비학교 첫 학기의 성적, 그리고 아버지의 반응

아라우 예비학교에서 처음 보낸 학기의 성적은, 최고점이 1, 최하점이 6인 방식으로 평가됐다.

바리 R. 파커의 저서 “Einstein: The Passions of a Scientist”에 아인슈타인의 당시 성적은 불량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몇몇 과목에서는 평범한 수준에 머물렀다.

수학과 물리는 특히 우수했으며, 바이올린 실력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눈에 띄게 뛰어난 학생”이라는 평가는 받지 못했다.

예비학교 교장이었던 요스트 빈텔러는 아인슈타인의 지적 능력은 분명히 뛰어난데, 왜 성적이 이 정도에 머무는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빈텔러는 그를 자신의 집에 하숙시키고 있었고, 교육자로서뿐만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돌보고 있었다.

1895년 크리스마스, 빈텔러는 아인슈타인의 성적표를 그의 부모에게 보냈고, 아버지 헤르만은 이에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이렇게 썼다.

“좋은 성적도, 나쁜 성적도 섞여 있는 건 우리 아들에게 늘 있는 일이라 딱히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2학기에 들어서는 평가 체계가 바뀌어, 6이 최고점, 1이 최하점인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됐다.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환경과 평가 체계에 잘 적응했고, 졸업 시점에는 성적도 크게 향상됐다.

아래에 있는 성적표는 1896년 10월, 아르가우 주립 칸톤스쿨 졸업 당시 발급된 공식 증명서로, 수학, 물리, 기하 등 이과 과목에서 최고점인 ‘6’을 획득했다.

예비학교 첫 학기의 성적, 그리고 아버지의 반응

늘 학교와 선생님과 충돌을 거듭하던 젊은이가, 드디어 자신의 능력을 있는 그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나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라우에서의 생활은 아인슈타인에게 참신하게 다가왔다. 독일식 교육과 달리, 이곳은 자유로운 발언과 독립적 사고를 장려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독일에서의 권위주의적 김나지움 6년 교육과 비교할 때,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바탕으로 한 교육이 얼마나 뛰어난지, 나는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분명히 느꼈어요.”

 

스위스 연방 공대에서의 학문과 갈등

아인슈타인은 1896년 아라우 예비학교를 졸업한 후, 정식으로 ETH에 입학했다.

물리에 대한 관심은 변함이 없었지만, 학업 성적은 꾸준하지 못했다.

특히 수학에 대해선 강의를 가볍게 여기고, 체계적으로 배우기보다는 독학과 실험적 사고에 더 매달렸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학생 시절에는, 물리학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려면 매우 복잡한 수학적 도구가 필수적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3학년에 접어들 무렵,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과 학과장이었던 하인리히 베버 교수와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됐다.

베버는 아인슈타인의 태도에 반감을 느꼈던 듯하며,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넌 아주 똑똑해. 정말 뛰어난 두뇌를 가졌어. 하지만 결정적인 결점이 하나 있어. 남에게 뭔가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아인슈타인도 베버 교수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교수는 당시 최신 이론이었던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조차 가르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수업에서 점점 멀어졌고, 자택이나 취리히 시내 카페에서 최신 물리학 서적을 탐독하는 생활로 방향을 틀게 된다.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의 도움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의 도움
젊은 시절의 아인슈타인

 

그를 학업에서 붙들어준 이는 같은 반 친구 마르셀 그로스만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빠졌던 수학 수업의 노트를 정리해 전달해 주었고, 그의 졸업을 도운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만약 그로스만이 없었다면, 졸업조차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성적과 인맥을 활용해 교직을 얻으려 했지만, 베버 교수와의 불화가 발목을 잡았다.

여기서도 그로스만이 나섰다. 그의 아버지가 인맥을 활용해, 아인슈타인에게 스위스 특허청의 기술 심사관 자리를 주선해준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일을 통해 안정적인 수입을 얻으면서, 물리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게 된다.

언제나 위대한 성취 뒤에는, 예상치 못한 방황과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청춘기 역시 그러했다. 그는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자유로운 정신이야말로, 진짜 ‘천재’를 만든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REFERENCE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