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나는 왜 눈을 깜박이는 걸까?” 그럴 땐 괜히 “왜 깜박이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1분에 15번 정도 눈을 깜박이는 편인데, 전문가들 말로는 눈을 보호하고 촉촉하게 만들기 위해선 그 절반 이하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자주 깜박이는 이유는 뭘까?
1분에 15번이라니, 너무 많은 거 아닐까?
흔히 “눈 깜박임은 눈에 수분을 공급하고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알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역할만으로 ‘1분에 15번’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마치 “차에 기름만 넣으면 된다”고 하기엔 우리가 차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설명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영화관에 가서 정말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영화를 볼 때를 떠올려보자. 극도로 몰입하는 순간에는 눈을 깜박이는 횟수가 확 줄어들어서, 나중엔 “아, 눈이 좀 뻑뻑하네?” 하고 느낄 정도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영화가 잠깐 쉬어가는 장면이 나오면, 그제야 눈을 여러 번 깜박이며 몰입 상태에서 한숨 돌린다. 이게 바로 눈 깜박임과 뇌 활동이 연관되어 있다는 예시 중 하나다.
몰입에 따라 달라지는 눈 깜빡임, 뇌가 쉬는 ‘작은 틈’일지도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눈 깜박임이 시각 정보를 잠깐 끊어내면서, 뇌가 그 사이에 지금까지 받은 정보를 정리·정돈한다”는 가설을 제시해 왔다. 즉, 깜박임은 생리적 이유뿐 아니라 뇌에게 주는 ‘미니 휴식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아서 홀(Arthur Hall)이라는 연구자가 1940년대에 독서 실험을 진행했는데, “문장부호나 낯선 단어가 나오면 눈 깜박임이 증가한다”는 결과를 보고했다. 그 시절에는 측정 장비가 지금 같지 않아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지만, 최근 벨기에 겐트 대학교(Ghent University)의 루이자 보가츠(Louisa Bogaerts) 박사 팀이 이 현상을 정밀하게 살펴봤다.
독서 중 문장부호? 눈 깜박임이 4.9배 이상!
보가츠 박사 팀이 활용한 ‘Ghent Eye Tracking Corpus(GECO)’는 독서 중 시선 이동과 깜박임 타이밍을 초단위로 기록한 빅데이터다. 연구팀은 15명의 참가자가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소설을 읽는 동안, 시선 추적 장치로 이들의 눈 움직임과 깜박임 순간을 꼼꼼히 체크했다.
그 결과, 문장부호가 나오는 위치에서 깜박임이 평소보다 무려 4.9배나 늘어났고, 행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3.9배가량 증가했다고 한다. 문장부호와 행 끝이 겹치면 최대 6.1배까지 치솟았다고 하니, 단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인상적인 수치다.
왜 그럴까? 쉽게 말하면, 문장이 끝나거나 다음 줄로 넘어가기 전 짧은 순간에 뇌가 “여기까지 들어온 정보를 한번 정리해볼까?” 하는 식으로 시각 입력을 끊고 쉬어가는 것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아, 이제 문단 하나가 끝났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숨 돌려야지!” 이런 느낌이랄까?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낯선 단어가 등장할 때 깜박임이 더 잦아진다는 사실이다. 익숙지 않은 정보를 만났을 때 뇌는 그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바빠진다. 그 사이를 타고 눈 깜박임으로 시각 입력을 잠깐 멈춰, ‘지금 방금 들어온 내용’부터 정리하고 넘어가는 식이다.
깜박임 패턴으로 집중도나 피로를 측정할 수도?
이렇듯 깜박임이 무작정 일어나는 생리 현상이 아니라면,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꽤 많을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특정 문장을 읽을 때 깜박임이 갑자기 늘어난다면, “아, 이 부분에서 좀 더 큰 인지 부담을 느끼고 있구나”라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이런 데이터를 실시간 모니터링해서, 운전자나 항공 관제사의 집중력과 피로도를 감지하는 시스템으로도 응용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나온다.
다른 예시로, 시험 볼 때를 떠올려보자. 문제 푸는 중에는 깜박임 횟수가 확 줄어들다가, 문제를 다 풀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순간 깜박임이 불현듯 늘어날 수도 있다. 뇌가 “오케이, 여기까지 해결. 이제 다음!” 하는 식으로 정보를 정리하는 짧은 휴식 시간을 갖는다는 얘기다.
다음번에 책 읽을 땐 ‘내 눈’도 유심히 살펴보자
책에 몰입하다 보면 한 문장을 다 읽고 난 뒤, 무심코 멀리 초점을 옮기며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 있다. 그때 “아, 이게 내 뇌가 잠깐 쉬면서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정리하는 시간이구나”라고 의식해보면 어떨까.
또, 낯선 단어가 나왔을 때 “갑자기 내가 많이 깜박이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그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뇌가 아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혹은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긴 문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문단 하나를 끝냈다면, 눈을 여러 번 깜박여 뇌가 알아서 ‘한 텀 쉼표’를 찍어주길 기다려볼 법하다.
깜박임, 소소하지만 중요한 신호
결국 이 작은 눈 깜박임에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그냥 “아, 눈 마르네. 깜박여야지” 수준으로만 여겼다면, 사실은 그 순간 뇌가 꽤나 치열하게 ‘정보 정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놓치는 셈이니까.
오늘 하루, 문장을 읽을 때나 영화를 볼 때, 아니면 게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살짝 “나는 언제 깜박이고 있지?”를 의식해보자. 그 ‘찰나의 깜박임’ 덕분에 우리가 새로운 정보를 소화해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멋진 협업이란 말인가.
결국 눈과 뇌가 짧은 순간에 주고받는 이 콜라보 덕분에, 우리는 끊임없이 새 문장과 새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깜박했다!”는 말 뒤에, 이토록 흥미로운 의미가 숨어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