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시집 책한권으로 예일대를 넘은 17살 죄수 이야기

인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우리를 다시 솟구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대개 우리는 그것이 로또 당첨 같은 거창한 행운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일 것이라 기대하지만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구원의 손길은 의외로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곤 한다.

여기, 1.5평 남짓한 차가운 독방에서 절망을 씹어 삼키던 한 소년이 있었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는 절대 고독의 공간. 그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소년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낡은 시집 책한권이었다.

이 이야기는 17살의 죄수에서 예일대 법학 박사가 된 레지널드 드웨인 베츠(Reginald Dwayne Betts)의 실제 삶이다.

 

16세,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혹독한 대가

레지널드 베츠의 젊은 날은 암흑 그 자체였다. 그가 범죄를 저지른 건 불과 열여섯 살 때였다.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철없던 그는 차 안에서 잠든 남성을 위협해 차를 빼앗는 강도 행각을 벌였다.

순간의 선택이 불러온 대가는 가혹했다. 미국 사법 시스템은 ‘카재킹(Carjacking, 차량 강탈)’을 피해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중범죄로 다룬다. 특히 흑인 청소년에게 더욱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는 현실 속에서 그는 미성년자가 아닌 ‘성인’으로 기소되었다.

판결은 징역 9년. 꽃다운 10대의 전성기를 교도소, 그것도 성인 중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보내야 했다. 그중에서도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독방 생활이었다.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채, 좁은 방에 갇혀 보내는 시간은 17살 소년의 정신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외로움이 공포로 바뀌어가던 어느 날, 그는 복도를 향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누구든 좋아… 제발 나한테 책한권 좀 보내줘! 읽을 것 좀 달라고!”

 

찢어진 베개커버를 타고 내려온 책한권

찢어진 베개커버를 타고 내려온 책한권

소년의 절규에 응답한 것은 교도관이 아닌, 옆방의 동료 수감자들이었다. 그들은 베츠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방끼리는 서로 물건을 건넬 수 없는 구조였다.

그때 기발하고도 눈물겨운 작전이 펼쳐졌다. 수감자들은 시트를 길게 찢어 끈을 만들고 베개커버를 묶어 일종의 ‘즉석 도르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독방 문틈 사이로 조심스럽게 그 꾸러미를 베츠의 방 쪽으로 슬라이딩 시켰다.

떨리는 손으로 베개커버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낡은 책한권이 들어있었다. 더들리 랜들(Dudley Randall)이 엮은 시집, The Black Poets(흑인 시인들)이었다.

베츠는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책이 내 인생을, 내 영혼을 완전히 다시 조립했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꽉 막혀있던 독방의 벽이 허물어지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시어 하나하나가 그의 메마른 가슴에 박혔고, 그는 활자를 통해 감옥 밖의 넓은 세상과 다시 연결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는 죄수번호가 아닌,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뼈저린 깨달음을 얻었다.

“공부만이, 배움만이 이 지옥에서 나를 진정으로 해방해 줄 유일한 출구다.”

 

전과자에서 예일대 법학 박사로, 그리고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

전과자에서 예일대 법학 박사로, 그리고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

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베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학업에 매진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졸업하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명문이라 불리는 예일대 로스쿨(Yale Law School)에 합격하여 법학박사(J.D.) 학위까지 취득했다.

전과자라는 주홍글씨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우고, 시인이자 변호사로서 화려하게 재기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진정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성공 그 자체가 아니다. 그가 성공 이후에 보여준 행보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준 그 ‘책한권’의 힘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단순히 개인의 성공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또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한다. 서구권에서는 이를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라고 부르며, 받은 은혜를 당사자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제3자에게 베풀어 선의의 흐름이 사회 전체로 퍼지게 하는 것이다.

“교도소는 지구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입니다”

베츠는 비영리 단체 ‘프리덤 리즈(Freedom Reads)’를 설립했다. 목표는 단 하나, 미국 전역의 교도소에 도서관을 짓는 것이었다.

Freedom Reads의 홈페이지 첫 화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Freedom begins with a book.” (자유는 책한권에서 시작된다.)

그는 교도소를 “지구에서 가장 외로운 장소”라고 정의한다. 그 지독한 고독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수감자들이 책을 통해 성찰하고, 토론하며, 다시 사회로 돌아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이 프로젝트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맥아더 재단과 멜론 재단 등의 후원을 받아 지금까지 미국 전역에 550개 이상의 교도소 내 도서 공간을 만들었다. 기증된 책만 해도 무려 27만 5천 권이 넘는다. 삭막한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아름다운 원목 책장을 설치하고, 엄선된 문학 작품들을 채워 넣었다.

메인주 교도소의 수감자 치프 베어(Chief Bear)는 도서관이 생긴 날의 감격을 이렇게 전했다. “작

업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복도에 놓인 책장들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어요. 마치 크리스마스 날 아침, 선물 포장을 뜯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평소엔 밥 먹을 때 빼곤 코빼기도 안 비치던 녀석들까지 전부 책 주위로 몰려나왔죠.”

 

책은 닫힌 문을 여는 가장 조용한 열쇠

책은 닫힌 문을 여는 가장 조용한 열쇠

17살의 베츠가 차가운 독방 바닥에서 건네받았던 것은 찢어진 시트 끈에 매달린 낡은 책한권이었다. 하지만 그 책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는 아직 포기하기 이르다”라고 말해주는 세상의 위로였고, “너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알려주는 희망의 나침반이었다.

지금 베츠는 자신이 받았던 그 희망을 수천, 수만 배로 불려 다시 담장 안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비록 몸은 갇혀 있을지라도, 책을 펼치는 순간만큼은 누구나 평등하게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속에 갇힌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우연히 마주친 문장 하나, 책 한 권이 당신의 마음속 ‘독방’ 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레지널드 베츠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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