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어느새 우리는 또 다른 새해를 기다리는 시점에 와 있다. 이맘때면 괜히 달력을 넘기며 다음 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게 된다. 그런데 만약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엿볼 수 있다면 어떨까?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상상을 웃어넘기겠지만, 16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한 의사이자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이름만큼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시적이고 모호한 예언들은 세기를 넘어 이어지며, 때로는 전혀 뜬금없이 우리 시대의 사건에 끼워 맞춰지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를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 사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구약 성서와 점성술에 빠진 비관적인 시인’ 정도로 치부하기도 한다.
한때 한국에서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애매한 한 구절을 두고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TV에서는 특집 방송을 하고, 일부 사람들은 진지하게 지하 벙커나 비상 식량을 준비하기도 했다. 물론 1999년은 무사히 지나갔고, 그로부터 세기가 바뀌어도 인류 멸망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아직도 ‘어쩌면 맞출 수도 있는 미스터리한 예언가’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예를 들어, 9.11 테러나 COVID-19 팬데믹을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노라 해석하는 이들도 있고, 반대로 그의 예언은 그냥 모두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관심 있는 건 “그가 앞으로 어떤 일을 점쳤느냐”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해석에 따라 3797년까지 이어진다고 전해진다. 그 먼 미래까지 내다본다고 하니, 사실인지는 차치하고라도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그리고 바로 그 연장선에서, ‘2025년’에도 노스트라다무스가 남긴 시적 표현 속에 무언가 힌트가 있다고 한다. 매년 한 번씩 돌아오는 이런 류의 엔터테인먼트성 해석 “이번 해엔 무슨 일이 벌어진다더라”를 즐겨보는 사람들에게, 노스트라다무스의 이름값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노스트라다무스가 ‘2025년’에 대해 남겼다는 세 가지 예언은 대체 무엇일까? 물론 여기서 소개하는 내용은 그저 해석일 뿐이다. 원문 자체는 너무나 모호해서, 이 해석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내년에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대”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괜히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릴 수 있지 않은가. 과거에 맞은 적도 있고 틀린 적도 있는 게 바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가벼운 마음으로, 하지만 조금은 진지한 호기심을 품고 살펴보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해석가들 중 일부는 2024년에 중국이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2025년 예언에는 “오랜 전쟁에 지친 군대와 바닥난 재정”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금이나 은 대신 가죽, 갈리아(프랑스)의 놋쇠, 달의 인장을 주조한다”는 표현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읽힌다.
“장기화된 전쟁으로 더 이상 지불할 금전이 없다. 결국 다양한 국가들이 전쟁에 개입하거나, 최소한 화폐나 재정 문제로 인해 전쟁이 끝날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일부 인터넷 사용자들은 여기서 ‘달의 인장’을 터키의 상징으로, ‘갈리아의 놋쇠’를 프랑스의 영향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2025년이면 어쩌면 지칠 대로 지친 끝에 휴전이나 종전의 길을 모색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개입이나 자원 고갈로 인한 전쟁 종식 시나리오는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전쟁은 누구도 원치 않는 고통이니, 이런 예언이라도 현실로 이어져 전쟁이 멈춘다면 오히려 반길 일일지 모르겠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예언 해석은 더욱 흥미롭다. 2025년에 지구로 운석이 떨어지거나, 아주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스쳐 지나갈 가능성이 언급된다는 것이다. 물론 근래 들어 ‘운석 접근’ 뉴스는 심심찮게 들리지만, 아직 전 지구적 재앙이 일어난 적은 없다. 그런데 노스트라다무스를 믿는다면, 이번에는 좀 더 심각할 수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영국에서 “고대의 역병”이 재발하고, 이 새로운 전염병이 전쟁보다 더 지독한 난관이 될 거라는 식의 해석도 있다. COVID-19도 맞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대목은 예사롭지 않아 보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염병을 겪어왔다. 영국이라고 특별히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예언이 정말 영국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상징적인 표현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만 팬데믹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가 이런 말을 들으면, 괜히 또 긴장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속에는 남미의 브라질이 큰 자연재해 홍수나 화산활동과 같은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에 휩싸일 가능성이 포함되었다. “속이 빈 산맥의 길을 따라 지어진 새로운 도시 부근에서, 유독한 유황의 물을 마시게 되리라.” 이런 시적 표현은 듣기만 해도 섬뜩하다.
브라질은 세계적인 생물다양성의 보고이자, “세계의 정원”이라 불릴 정도로 풍부한 자연환경을 지녔다. 그러나 기후변화가 야기하는 이상기후와 환경 파괴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다. 브라질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혹시 이 예언은 지구온난화, 아마존 파괴, 혹은 새로운 질병을 부추길 생태계 교란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가 이 예언들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세기의 흐름 속에서 수도 없이 재해석되어 왔고, 그의 시는 항상 “얘기가 달라지게” 읽힐 여지를 남긴다. 어떤 이는 그를 “파멸의 예언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구약성서나 본인의 가정사를 통해 비관적 세계관을 형성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그저 그 시대의 불안과 두려움을 시적인 언어로 정리해놓은 시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예언들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면서도, 동시에 이 예언들이 암시하는 미래의 불확실성, 전쟁이나 전염병, 환경 파괴 같은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차피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상상은,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해준다.
실제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중 “2024년 자연재해가 맹위를 떨칠 것”이라는 비슷한 해석도 있었지만, 올해 들어와 지구 곳곳에서 기후이상 현상이 빈번한 걸 보면 완전히 틀렸다고만 하기엔 애매한 점도 있다. 그렇다고 너무나 뒤집어 맞추듯 예언을 끼워 맞출 필요는 없겠지만.
내년이 오기 전, 혹은 내후년을 기다리며 사람들은 또다시 노스트라다무스를 꺼내 들 것이다. “2025년엔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하는 궁금증에 허탈한 웃음을 짓거나, 반대로 조금 긴장하며 뉴스를 지켜볼 수도 있다. 어쨌든 그의 이름은 이렇게 매년 화제로 떠오르고, 우리는 그를 통해 미래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상상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의 가장 큰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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