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미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식 중 하나는 사과 파이가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사과 파이가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요리로 자리잡기까지의 역사는 의외로 복잡하다.
사실, 사과 파이의 기원은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1300년대 후반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과 파이 레시피에는 사과뿐만 아니라 무화과, 건포도, 배 등 여러 과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달콤한 파이와 달리, 이 레시피에는 설탕이 들어가지 않았고, 속재료를 담기 위해 ‘코핀’이라고 불리는 두꺼운 페이스트리 껍질에 구워졌다. 이 껍질은 식용이 아니라 그릇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사과 파이의 레시피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만 제국 등 여러 지역의 요리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사과 파이가 단일 문화에만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의 조합으로 탄생한 요리임을 보여준다.
사과 자체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다층적이다. 사과 나무는 1300년대부터 영국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지만, 그 기원은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자흐스탄의 티엔산 산맥에서 처음 자라난 사과는 수백만 년 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재배되었고, 유럽으로 전파된 후 결국 북아메리카에 도착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원래 크랩애플이라는 작은 신맛의 사과만 자생하고 있었지만, 17세기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이 제임스타운에 도착하면서 그들은 구세계에서 가져온 사과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미국에서는 다양한 사과 품종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사과 파이는 18세기와 19세기 동안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전형적인 “미국적” 디저트로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남북전쟁 시기, 북군과 남군의 병사들이 전쟁 중 사과를 찾아 농장을 습격하고 파이를 만들어 먹었던 경험은 사과 파이를 미국인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겼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사과 파이는 본격적으로 미국의 상징이 되었다. 1902년 뉴욕 타임스는 사과 파이를 “번영의 미국적 대명사”로 소개하며, 이 디저트를 미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잡게 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 사이에서는 “엄마와 애플 파이를 위해 싸운다”는 구호가 퍼지며 사과 파이는 미국 가정과 생활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아시아에서 전해진 사과, 중동에서 유래한 밀, 유럽의 레시피가 결합된 사과 파이는 미국의 다문화적 정체성과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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