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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타고나는가, 아니면 학습되는가? 아이에게 공포 학습시킨 실험 ‘리틀 알버트 실험’

아기에게 공포를 가르칠 수 있을까?

듣기만 해도 “미친 거 아니야?” 라는 질문을 실제로 실행한 미친 사람이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존 B. 왓슨(1878~1958)이다. 당시 그는 생후 9개월 된 아기를 대상으로, 특정 자극을 반복하면 무서움을 ‘학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시험했다.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명백히 윤리에서 벗어난 이 실험은 ‘리틀 알버트 실험(Little Albert experiment)’으로 불린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실험을 진행했는지, 그리고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명문대 심리학자

 

왓슨은 1878년 1월 9일, 미국 남동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집안 사정을 보면, 온갖 불행이 겹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에다 여러 여자를 가까이 두는 사람이었는데, 왓슨이 13살 때 불륜 상대를 따라 집을 나가버렸다. 남겨진 어머니는 극도로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분이어서, 아들에게 술과 담배, 춤까지 엄격히 금지시켰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왓슨은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십대 시절을 보냈으며,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평생 짊어지고 살았다. 그럼에도 의외로 성적은 매우 뛰어났다. 지역 파먼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07년에는 명문 존스 홉킨스대학교에서 심리학 조교수 자리를 얻었다. 이후 1913년 강연에서 당시 주류였던 ‘의식의 내면을 탐구하는 심리학’을 뒤로하고, ‘외부에서 관찰 가능한 행동에 집중하는 심리학’을 제안했다. 이것이 훗날 ‘행동주의 심리학’이라 불리게 된다.

 

금속음과 흰 쥐,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다

 

왓슨은 1920년, 스스로 내세운 이 ‘행동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감행했다.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9개월짜리 아기였고, 이 실험을 함께 진행한 조수는 로자리 레이너(1898~1935)라는 여성 연구자였다. 실험 대상이 된 아기는 ‘알버트 B(Albert B)’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편의상 ‘알버트 보야’라는 호칭으로 부를려고 한다.

 

왼쪽: 산타클로스 가면을 쓴 존 B. 왓슨, 오른쪽: 앨버트 보야

 

먼저 왓슨과 레이너는 알버트 보야에게 흰 쥐, 토끼, 개, 원숭이 등 온갖 동물을 보여주었다. 또 산타클로스 가면을 쓰거나 불붙은 신문지를 흔들어 보이기도 했는데, 알버트 보야가 이런 대상들을 무서워하진 않았다. 문제는 아기의 뒤에서 쇠막대를 망치로 세게 두드리는 순간 시작되었다. ‘쾅’ 하는 큰 금속음에 깜짝 놀란 아기는 울음을 터뜨렸고, 이후로는 흰 쥐만 보여줘도 두려움에 울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마치 파블로프가 개를 대상으로 했던 조건 형성 실험과 유사하다. 파블로프는 벨을 울리고 곧바로 개에게 먹이를 줘, 나중엔 벨 소리만으로도 침을 흘리게 만들었다. 똑같은 원리를 아기에게 적용한 것이다. 반복적으로 “흰 쥐가 보일 때마다 금속음을 낸다”라는 상황을 주입하자, 알버트 보야는 쥐만 봐도 움찔하며 겁에 질렸다. 심지어 토끼나 가면 등 흰색·털·특유의 모양이 있는 물체를 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울어버렸다.

 

후천적으로 공포를 학습하다

 

 

이 실험을 통해 왓슨은 “공포심은 타고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환경적 자극을 통해 후천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말하자면 아기는 본래 몰랐던 ‘공포’를 반복적이고 학습적인 방식으로 얻게 된 셈이다. 그러나 윤리 문제는 피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실험이라 해도, 아기에게 일부러 공포를 심어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실험은 당대에도 비난을 받았다.
오늘날의 기준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이 불법적인 연구다. 실제로 ‘리틀 알버트 실험’이 지닌 비인도성 때문에, 이후 심리학 연구 전반에서는 아동이나 피험자의 정신적 피해를 고려하는 윤리 규정이 더 강해졌다.

 

수수께끼로 남은 ‘알버트 보야’의 진짜 신원

 

왓슨의 실험이 악명을 얻은 이후, 학계에서는 “알버트 보야는 누구였나?”라는 궁금증이 이어졌다. 2009년쯤에는 “그가 더글러스 메릿(Douglas Merritte)이라는 아이였다”라는 설이 나왔다. 당시 존스 홉킨스대 병원에 근무하던 알빌라 메릿(Arvilla Merritte)이 자신의 9개월 된 아기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글러스는 수두증을 앓아 1925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반면 2014년에는 “윌리엄 알버트 바저(William Albert Barger)라는 인물일 수 있다”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윌리엄은 2007년까지 건강하게 살았고, ‘알버트 B’라는 본명, 체격, 외모 등이 실험 기록과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 다만 그가 개를 유독 싫어했다고 알려져, 이를 두고 리틀 알버트 실험의 후유증이 아니었겠느냐는 말도 나왔다. 두 설 모두 결정적 증거가 부족해, 알버트 보야가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결국 파멸과 불행으로 치닫다

 

그렇다면 이 논란의 실험을 벌인 왓슨 본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왓슨은 원래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으나, 1921년에 조수 로자리 레이너와의 불륜 스캔들이 터져 대학에서 쫓겨났다. 아내와 이혼한 뒤 레이너와 재혼하고, 학계 대신 광고업계에 발을 들였는데, 이때 낳은 아들들 중 한 명이 결국 자살을 시도해 목숨을 잃었다.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딸도 같은 시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레이너는 1935년,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왓슨은 농장으로 들어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다 1958년에 80세로 생을 마감했다. 한때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로 이름을 날렸으나, 가정사를 비롯해 그의 말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왓슨의 실험이 남긴 것

 

리틀 알버트 실험이 학문적으로 ‘조건 형성’의 개념을 분명히 보여줬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남긴 후유증은 학계와 대중 사이에 깊은 윤리적 고민을 던져줬다. 태어난 지 겨우 아홉 달 된 아기를 공포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은, 그 어떤 과학적 발견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웠다.

가난과 폭력, 비윤리적 실험에서부터 파생된 논란에 이르기까지, 왓슨이 걸어온 길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리틀 알버트 실험은 공포가 학습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한 아기의 눈물과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잊을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일부러 공포를 주입했다는 점은, 지금도 심리학계가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연구 윤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사례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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